해바라기는 꽃봉오리가 해를 따라 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센티멘털리스트인 ‘나’와는 달리 낙천주의자인 친구 ‘운천’은 희망을 쫓아다니는 해바라기 같다.
아리따운 여성과의 사랑을 꿈꾸다 좌절하지만 낙천주의자에게 사랑의 아픔은 오래가지 않았다. 금세 실연의 아픔을 딛고 태양을 따라가는 해바라기처럼 일확천금의 꿈을 꾸며 희망찬 여정에 나선다.
학창 시절에 ‘운천’ 같은 낙천주의자 친구가 있었다. 항상 웃는 얼굴에 시험 스트레스도 안 받는 것 같고, 진로에 대한 고민도 없는 듯 항상 태평한 인생 그 자체였다. 사회인이 되고도 오랜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난 그 친구는 여전히 낙천적이며 태평하게 잘 살고 있었다.
센티멘털리스트인 ‘나’의 입장에서 이러한 친구의 무한 긍정 낙천주의는 부러울 따름이다. 주변에 이런 친구 하나쯤 있으면 좋지 않을까.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하진부리에서 한성사범학교 출신으로 교직에 있었던 부친과 성결교단 집사였던 모친 사이에서 1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가산으로,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0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 중인 1928년 잡지 『조선지광』에 단편소설 「도시와 유령」을 발표해 데뷔했고 「행진곡」, 「기우」 등을 발표하면서 구인회에 참여했으며, 「돈」, 「수탉」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그의 초기 작품은 경향문학의 성격이 짙은 「노령근해」, 「상륙」, 「북국사신」 등으로 카프 진영으로부터 동반자작가라는 호칭을 듣기도 했다.
1932년경부터 그의 작품세계는 초기의 경향문학적 요소를 탈피하고 그의 진면목이라고 할 수 있는 순수문학을 추구하게 된다. 1934년부터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강의하면서 「산」, 「들」 등 자연과 교감하는 수필작품을 발표했고, 1936년 「메밀꽃 필 무렵」을 통해 1930년대 조선 시골 사회를 아름답게 담았다. 그 후 성 본능과 개방을 추구한 「장미 병들다」, 「화분」 등을 발표했다.
그의 저작 활동은 100편에 가까운 단편에 집중되어 있으나, 경성제일고보 재학 중에 발표한 시를 비롯해 장편소설, 수필, 평론, 희곡·시나리오, 번역 등 다방면에서 작품을 발표했다.